김 삿갓의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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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시인사(詩人社)’에서 1980년 3월 10일 초판 발행한 ‘김 삿갓 시집: 단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만리’의 편저자인 신경림(申庚林)의 글이다.

책 제목: 김 삿갓 시집(詩集): 단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만리
저자: 김립(金笠), 김병연(金炳淵)
편저: 신경림(申庚林)
발행인: 조봉신(趙鳳信)
주간: 조태일(趙泰一)
발행처: 시인사(詩人社)
초판발행일: 1980년 3월 10일
등록번호: 제2-525 (등록일자 1978년 3월 8일)
주소: 서울 중구 오장동 139의 19
인쇄처: 창제인쇄공사(昌濟印刷公社)

편저자의 글

방랑시인 김삿갓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이이고 어른이고 모르는 이가 없을이만큼 유명하다. 그의 생애를 주제로 한 노래도 있고, 소설도 여러 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막상 김삿갓의 무엇을 어느만큼 알고 있는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선뜻 대답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뜻밖에 그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름과 몇 가지 기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머릿속에 격식과 품위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 문학관이 형성되어 있어 그것이 이단적인 시인을 한갖 기인 내지 거지 시인으로 치부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시 몇 편만 읽어보면 이 시인이 얼마나 우리의 서민생활을 표출하는 데 빼어났으며, 우리 말이 가진 감각을 포착하는 데 능숙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의 긴 방랑생활은 그로 하여금 한 초월자로 되게 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끝내 서민과의 일체감을 잃지 않았으며, 시의 솜씨가 더욱 익어가면서 일체감도 더욱 짙어진 흔적을 볼 수 있다. 이제 이름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의 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 시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재평가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김삿갓, 즉 김립에 대한 기록이 있는 문헌은 그다지 없다. “대동기문(大東奇聞)” 속에 삿갓을 쓴 방랑시인 김립의 이름이 보이고 그의 본명이 김병연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해동시선(海東詩選)”에 그의 율(律)이 몇 편 들어 있다. 그리고 더 자세한 기록으로 황오(黃五)의 “녹차집 김사립전(綠此集 金莎笠傳)”이 있는데, 이름 사이에 사(莎)자 하나가 더 들어있으나 이 역시 그 행적으로 보아 김립과 동일인임이 분명하다. 또 신석우의 “해장집 권13 김대립전(海藏集 卷13 金籉笠傳)”에 그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 보이는데 籉笠 역시 笠과 동일인으로 보아 틀리지 않는다고 여러 연구가들이 일치하여 확언하고 있다.

그러나 김삿갓에 대한 자료는 거의 구전에 따른 것이다. 전국 어느 곳이고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그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으례 한두 편의 그의 시와 기행이 흩어져 있었다고, 그의 연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몇가지 문헌과 연구가들이 재정리한 기록에 따라 김삿갓의 생애를 약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립의 생애

김립은 1807년 (순조 7년)에 양주(楊州)에서 장동(壯洞) 김씨 집안에 태어났다. 이름은 병연,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였다. 그는 22세에 집을 나와 57세에 죽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았는데 그 연유는 이러하다.

1811년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을 때 김립의 조부 김익순(金益谆)은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로 있었다. 홍경래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여 난이 시작된 지 불과 얼마 아니하여 선천은 함락되고 김익순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2월에 홍경래는 정부군에 패하였고, 김익순은 항복의 책임을 물어 죽임을 당하고 일족은 폐족(癈族)되었다.

이때 김립은 여섯 살이었는데, 종복으로 있던 김성수(金聖秀)가 그의 형과 둘을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데려갔고, 그는 그 곳에서 자라나며 공부도 했다. 그 뒤 처벌이 김익순 하나에 그치게 되자 립은 부친 김안근(金安根)에게로 돌아가서 살았다. 그는 처음에는 집안의 내력을 몰랐다.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몰락한 양반의 후예이거니 여기고만 있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사서오경, 제자백가, 사기통사 등 그가 섭렵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문재는 뛰어난 바 있었으며, 야심만만한 젊은이로 자라갔다. 그가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그의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가 그의 집안 내력을 알게 된 것은 20세가 되어서 결혼까지 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는 그 때까지 출세를 위하여 열심히 과거공부를 했다. 20세가 되던 해 그는 처음 과거를 보았다. 과거의 글제가 묘하게도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谆罪通干天”이었다. 김립은 단순에 정가산의 충절을 기리고 김익순의 배신을 꾸짖는 웅렬통쾌한 글을 지어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러나 장원급제자가 바로 김익순의 후손임이 알려지자 그의 장원급제는 취소되었다. 비로소 집안 내력을 알게 된 그는 폐족의 자손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받아야 할 학대와 모멸을 견디지 못하여 삿갓 하나를 쓴 채 집을 나선다. 이때 나이 스물 둘이었는데 이미 그에게는 장남 학균(翯均)이 태어나 있었다.

그는 3년간 방랑을 계속하다가 일단 귀가하여 차남 익균(翼均)을 낳았다. 그리고는 나가서 57세를 일기로 전라도 동복(同福)에서 사망할 때까지 한 번도 귀가하지 않았다.

그 사이 차남 익균이 장성하여 이 시인이 안동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울며 귀가할 것을 간청했으나 김립은 거지의 모습을 한 채 태연히 웃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또 한번은 역시 익균이 평강에서 부친을 찾았으나 이번에는 아들을 심부름을 보내 놓고는 그 사이 도망쳐 버렸다 한다. 세째 번에는 여산(礪山)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익균이 찾아갔었는데, 함께 길을 가다가 뒤를 보겠다고 삿갓을 벗어놓고 수수밭에 들어간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고 한다.

김립은 1863년 전라도의 동복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차남 익균이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儀豊面) 태백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22살에 집을 나가 57살에 작고했으니 그의 방랑생활은 무려 35년에 걸친다. 그 35년 사이에 전국 삼천리 방방곡곡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그는 한 곳에서 단 1년을 머무르지 않았다. 속설에 단천(端川)에서 한 처녀와 결혼하여 훈장질을 하면서 2년 동안 살았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의 사후에는 물론 생전에도 이미 그의 문명이 높아지니까 전국 곳곳에서 가짜 김삿갓이 생겼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것도 가짜 김삿갓의 행위일 가능성도 없지 않고, 또 후세인들이 그의 시에서 유출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그의 전국 방랑이 과장되어 전해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1920년대의 조사자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 무렵 도처에 어릴 적에 실제로 김삿갓을 보았다는 노인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들이 증언하는 김삿갓의 행색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다. 그들이 보았다는 김삿갓 가운데는 가짜가 섞여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김삿갓의 이름을 빌어 한 끼의 밥, 하룻밤의 잠자리를 더 편히 가져보자는 얄팍한 잔꾀의 가짜도 없지 않았으나, 김삿갓이라는 이름에 얹혀 자기의 시를 민중 사이에 전파코자 하는 눈물겨운 지방의 무명시객들 또한 많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가짜 김삿갓의 출현은 조금도 김삿갓의 문학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중 사이에 얼마나 그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그의 시가 널리 읽히고 있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일 터이다.

김립의 시

김삿갓의 방랑은 일화가 말해주듯 개인적인 것이 동기가 된다. 삿갓을 쓴 것도 나라에 죄를 지은 죄인이니 하늘을 어찌 보겠느냐는 뜻이니, 세상의 흐름에 거역하겠다는 근대적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말하시는 어렵다. 그러나 긴 방랑생활을 통하여 가난한 백성과 삶을 함께 하고 권력을 쥔 자, 재산을 가진 자로부터 온갖 수모를 받으면서, 그는 서민과 일체감을 갖게 되고, 영달의 길에서 밀려난 한 선비의 울분은 서민들의 울분으로 보편화된다.

당시 그가 서민대중들로부터 널리 사랑을 받은 것은 서민대중이 하고 싶은 말을 그가 해주는 까닭이었다 가진 자에 대한 그의 가시 돋힌 조롱, 칼날 같은 야유는 그대로 서민들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당혜(唐鞋)와 솜을 두어 근 넣은 송말(宋襪)을 신고
아침에 찬 서리 밟고 나가면 해질 녘에야 돌아온다.
연록색 두루마기는 길어 끌리고
자홍빛 당부채는 반쯤 하늘을 가리었다.
시 한 권을 겨우 읽고 능히 율을 말하고
천금을 다 쓰고도 오히려 더 돈을 쓰려든다.
주문(朱門)에 종일토록 머리 숙여 엎드려 있다가도
고향 사람 찾아오면 그 기세 대단하다.

이라든가,

방관에 장죽을 물었으니 양반집 자식엔 분명하나
이제 겨우 맹자나 읽었을까.
백주에 지어미 뱃속에서 갓 나온 원숭이 새끼 같은 것이
글읽는 소리 황혼에 개구리 새끼들 시끄럽게 우는 소리구나.

등의 시는 권문이나 들락거리면서 벼슬길을 찾는, 그러면서도 고향 사람이라도 만나면 허세를 부리기를 잊지 않는 이씨 왕조 말엽의 맥빠진 선비상이며, 하는 일 없이 오직 비생산적인 공론으로 세월을 보내는 지방 양반들의 모습을 더 없이 생생하게 보여줄 뿐더러, 그들에 대한 조롱은 통쾌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김삿갓의 시중 절창은 역시 거지로 떠돌면서 신세를 한탄한 자탄시(自嘆詩)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읽어 보자.

높고 높은 하늘이라 머리조차 못들겠고
넓고 넓은 땅이라서 발조차 못뻗겠네
새벽에 누각에 올라도 달조차 즐기지 못함은
사흘 밥 굶었으니 신선 놀음 어디 있으랴.

자신의 역경을 읖은 시로서, 이백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하룻밤의 잠자리를 거절당하고 잘 곳이 없어 흙구덩이 속에 들어가 자다가 비좁아 견디지 못해 누각에 올라 지은 노래이다.

고을 이름 개성인데 왜 문이 닫혔는고
산 이름 송악인데 어찌 땔 나무가 없는고
황혼에 나그네 쫓는 일 사람 도리 아닌데
이 동방 예의의 나라에서 너 혼자 무슨 진시황이었더냐.

이 시는 개성에 가서 하룻밤 묵기를 청하니, 주인이 땔감이 없어 구들이 차니 다른 집으로 가 보라 쫓으므로 지은 시이다.

얼핏 보기에 이 시들은 단순한 떠돌이의 설움, 세상 인심의 야박함을 노래한 것들로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 속에는 인간의 근원적 설음이 있고 한과 고독이 있다. 김삿갓의 시들이 한 개인의 감정의 표현이라는 차원을 넘어선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이 까닭인 것 같다.

또한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풍류시인으로서의 김삿갓이다. 달과 바람과 산수는 그의 시에서 때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다른 많은 한 시인에게서처럼 사람이 사는 일과 따로 떨어져 표현되어 있지 않은 점이 이 시인의 특정이다. 그의 풍류시들을 살펴보면 아름답게 재현된 산수 그 어느 한 구석에 초라한 이 시인의 행색이라든가 또는 가난하고 덧없는 삶의 조각이 떨어져 있다. 시는 시대로, 삶은 삶대로 영위해온 다른 시인에게서는 좀체로 보기 어려운 점이라 하겠다.

일부 평자들은 풍류시를 들어 이 시인이 사람이 사는 일에 초연한 시인이라 말하고 있으나, 그의 풍류시 어느 한 구석에는 삶에 대한 안타울이만큼의 애착이나 미련이 직접적 또는 역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가난한 삶을 보고 직접 살아가고 있는 그로서 산수의 아름다움만 노래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도 짐작이 간다.

이러한 폭넓은 그의 시세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 있어 골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풍자와 골계이다. 그를 풍자시인, 골계시인으로 부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잘 사는 이, 못 사는 이, 잘난 이, 못난 이, 모두가 그의 조롱의 대상이다. 어떤 의미에 있으 그는 익살에 천부적 재질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시를 들으면서 웃다가 문득 웃음을 멈추게 된다. 그의 웃음 곳에 감추어진 날카로운 칼을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또한 그의 웃음 곳에서 삶에 지친 자신의 자화상을 대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의 풍자와 해학과 골계 속에는 이 땅에서 오랜 세월 가난과 학정에 시달려온 민중의 설움이 있다. 분노의 외침이 있다.

이러한 특징의 일면이 두드러진 것에 새김(訓)으로 만든 시와, 한글과 한문을 섞어 쓴 시들이 있다. 이러한 시들로 하여 그는 이단시인으로 불리기도 하고, 젊잖지 못한 시인으로 치부되기도 하나, 우리말에 내재한 운률에 그가 얼마나 민감했는가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청송(靑松)은 듬성 담성 립(立)이요
인간(人間)은 여기 저기 유(有)라
소위(所謂) 언뜩 삣뜩 객(客)이
평생(平生) 쓰나 다나 주(酒)라

지금의 눈으로 볼 때 민요처럼 덜 정리된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이란 선비들 사이에 전혀 국문의식이 없던 시절이다. 한글로 시를 짓겠다는 그 생각만도 당시에 있어서는 크게 진보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의 시적 본질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러한 시 가운데 떠돌이의 체념된 삶과 민중의 억눌려진 한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19세기 중엽 시달리고 억눌려온 민중의 한과 설움과 작은 기쁨을 직접적 또는 역설적으로 노래한 김삿갓은 당시의 민중적, 민족적 현실을 그 몸 속에 체현하고 있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머지 않아 그들 또한 외세의 침략 앞에 떠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이제 이단의 시인에서 민족의 시인, 민중의 시인의 자리에 나와 앉아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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